정비사가 쓱 한번 보더니 라디에이터에 금이 갔고 냉각수관이 깨졌다고 진단하면서 "오늘 밤 늦게나 내일까지는 시간을 주셔야 할 것 같네요."라고 말하더군요. 부품을 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수리비가 좀 나올 거라는 말을 들은 저는 "잘 고쳐 주세요."라고 말을 하며 시계를 봤습니다. 10시 45분이더군요.
'음... 잘 하면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겠는 걸!' 렌터카를 잡아 타고 바로 내려가면 13시 25분에 시작하는 강의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저는 교육 담당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렌터카로 출발하면 시간 맞춰 갈 수 있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담당자는 "취소했기 때문에 윗분에게 의견을 물어봐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좀 기다려 달라고 덧붙이더군요. 그에게서 전화가 와서 "네, 강의가 가능합니다. 단, 늦지 않게 와 주시기를 부탁합니다."라는 답을 들은 저는 전화를 끊자마자 정비센터 사람에게 렌터카를 빌릴 데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다행히 그 사람은 자기 네트워크 상의 렌터카 업체에 연락해 차를 섭외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렌터카가 정비센터에 도착한 시각이 11시 7분이었고 이런저런 확인과 서명을 하느라 시간을 소요한 다음 제가 렌터카를 몰기 시작한 시각이 11시 12분이었습니다. 내비게이션을 보니 도착 예정시간이 13시 8분. '도착해서 화장실 갈 시간은 있겠군.'이라며 저는 마침내 고속도로에 들어섰습니다.
어제가 월요일 같은 화요일이라 그런지 고속도로 정체가 심하더군요. 비도 오락가락하다가 어떤 구간에서는 소나기처럼 퍼붓고.... 참 '하늘도 무심하시지' 싶은 날씨였습니다. 도착 예정 시간은 1분씩 늘어나더니 급기야 13시 22분을 찍더군요. 불안에 휩싸인 저는 '강의하겠다고 괜히 다시 전화했나?' 후회스러웠습니다.
이렇게 불안과 후회와 긴박감에 휩싸인 저는 어떻게 해서 그 빗길을 뚫고 강의장까지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확히 2분 전(그러니까 13시 23분)에 도착한 저는 바로 단상에 올라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담당자가 숨 돌릴 시간도 주지 않는다는 원망에 들기도 했지만 제 입을 바라보는 100명의 참석자들에게 약속을 지켰다는 안도감이 더 컸습니다. 처음엔 호흡이 가빠서 발음이 어려웠지만 3분쯤 지나니까 제 심장도 안정을 찾았고, 나름 만족스럽게 강의를 끝마쳤답니다.
올라오는 길에 정비센터에서 "차 수리가 저녁 6시쯤 끝날 테니 그때 오세요."라는 전화가 왔고, 오늘 하루 저를 지치게 만든 차를 몰고 러시아워의 정체를 뚫고 집에 도착했습니다. 도착 시각은 저녁 8시 30분. 파란만장한 하루를 끝내고 돌아온 저에게 여지없이 몸살이 찾아왔고 저는 저녁을 먹는둥마는둥 했죠. 정말 피곤하고 아파서 경영일기를 하루 스킵할까 하는 유혹이 들었지만 기어이 쓰고는 평소보다 이른 시각인 10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유난히 힘든 하루이긴 했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이리 장황하게 떠든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그래도 제시간에 강의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집에서 일찍 떠났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강의장까지는 자동차로 2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했지만, 저는 4시간 25분 전인 9시에 집을 나섰죠. 2시간 가량의 '버퍼'를 설정했던 겁니다.
평균 소요시간의 1.5 ~ 2배 정도 일찍 출발하는 것. 이것은 제가 어디를 갈 때마다 하는 습관입니다. 불확실한 상황이 벌어져 자칫 약속에 늦을 수 있는 경우를 미리 예방하기 위한 저만의 철칙이기도 합니다. 불확실성을 대비하려면 이렇게 시간이라는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저는 이 이야기로 강의의 서두를 열었습니다. 강의 주제가 '미래 대비를 위한 시나리오 플래닝'이었기에 바로 직전에 일어난 저의 에피소드가 아주 적격이었죠. "불확실성을 대비하려면 예측하려고 애쓰지 말고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준비에는 돈이나 시간을 충분히 투여해야 합니다. 소위 '마음의 준비'로는 아무 소용이 없죠."라고.
예전에 약속 시간에 꼭 늦는 사람과 함께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에게 왜 늦었냐고 타박을 하면 "시간 맞춰 나왔다."라고 늘 변명하더군요. 1시간 걸릴 거리라면 딱 1시간 전에 맞춰 나오는 걸 '효율'이라고 착각하던 그와 더 이상 같이 일하지 않습니다. 그 피해는 오롯이 제가 감당해야 했으니까요.
'불확실한 상황을 대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말을 좀 장황하게 했군요. 어제 번 강의료는 차 수리비로 몽땅 들어갔지만 어차피 언제든 고장날 것이었으니 불확실성을 '시간'으로 잘 대비한 것 치고는 꽤 남는 장사였습니다. 읽고 보니, 제 자랑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