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한테 물어보니까 사지 말라고 합니다'라는 말이 그저 핑계가 아니라 참말일까요? 참말이라고 가정하자면 저는 왠지모르게 슬퍼지더군요. 워크맨 하나 구입하는 데 O만원도 마음대로 지출하지 못하다니요! 어디 가서 친구들이랑 술 한 잔 한다 해도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써야 할 텐데, 혹은 가족끼리 가볍게 외식을 하더라도 O만원 쯤은 우습게 넘는 게 요즘 물가인데, 어쩌다 큰 맘 먹고 워크맨을 구입하려는 욕구를 저지 당하나 싶어서 그렇습니다.
물론 구매자들의 와이프들께서 '워크맨 같은 것에 O만원을 지출하는 건 아깝다. 유튜브로 음악 들으면 되잖아! 그 돈이면 씨...'라고 일갈하고픈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닙니다. 애같은 남편이 유치한 취미 생활에 정신 못차리는 것 같아 혼구녕을 내고 싶고, 한번 물꼬를 터주면 한없이 깊은 '개미지옥'에 빠져 버릴 것 같아 처음부터 철저히 단속하고 싶은 것이겠죠.
각자의 이유가 있을 테지만, 그래도 '와이프가 사지 말래요'라는 구매자의 글을 보노라면 심연의 바다에 돌멩이 하나 가라앉는 듯한 슬픔이 아려옵니다. 무슨 마약에 손을 대는 것도 아닌데 애초에 발을 담그지 말라니요! 남자들을 두둔한다고 욕하지는 마세요. 와이프들로부터 '남편이 사지 말래요'라는 듣는다 해도 저는 똑같은 슬픔에 사로잡혔을 테니까요.
하지만 '와이프가 사지 말래요'라는 말은 거짓말일 때가 더 많다는 게 제 짐작입니다. 사고 싶은 마음이 급해서 '제가 사겠습니다'라고 말했다가 화장실에 가서 속을 비우고 나와서는 '그걸 산다고 내가 음악을 얼마나 더 듣겠나' 싶어서 구매 욕구가 싹 사라지는 경우가 더 많을 겁니다. 다른 곳에서 더 좋은 물건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구매욕이 싹 옮겨가는 경우가 더 많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궁금합니다. '와이프가 사지 말래요'라는 말이 왜 좋은 핑계가 된 걸까요? '죄송하지만 구매 의사를 철회하겠습니다.'라고 솔직히 이야기하지 못하는 걸까요? 왜 애먼 와이프를 운운하며 빠져 나가려 하는 걸까요? 와이프는 '사라 마라' 아무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와이프 핑계를 대면 상대방이 '네네, 그렇군요.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죠'라고 바로 납득할 것 같은가 보죠?
제 물건을 안 산다고 해서 화를 내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안 산다고 해도 다른 누군가가 살 테고 안 팔린다 해도 경제적으로 제가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에게만 그런지 모르겠으나 그저 '와이프가 사지 말래요'란 핑계가 잦다는 게 흥미로울 뿐입니다. 유년시절에 '엄마가 하지 말랬어'라는 누구도 토달 수 없는 변명이 어른이 되어 '와이프가 사지 말래요'라는 훌륭한 핑계로 옮겨 간 것인지 모르겠어요.
이유야 어떻든, '와이프가 사지 말래요'라는 말로 둘러대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한 태도입니다. 남에게 '나는 악덕 와이프와 산다'라고 폭로하는 거나 마찬가지임을 아셔야죠. 설령 진짜로 와이프가 못 사게 했더라도 말입니다. 저도 와이프에게 '이거 사고 싶어' 했다가 숱하게 까이지만, 누군가에게 '와이프가 사지 말래요'란 소리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자에게 실상을 고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최근에 이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와이프한테 다시 말했더니 사라고 합니다. 계좌번호 알려 주세요." 그 분이 와이프를 설득하느라 얼마나 애썼을까 짐작해 보니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이 아파 오더군요. '와이프가 사라고 했어요'라고 말하며 신이 났을 모습을 상상하니 얼마라도 깎아 드려야 하나 싶었답니다. 하지만 저는 구매할까 말까의 상황에서 '와이프 운운'하는 분들께는 얄쨜없답니다. '와이프 핑계'라는 밈(meme)을 멸하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