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의사결정을 할 때 숫자가 주는 힘은 무시하지는 못합니다. 사안이 중요할수록 숫자는 위력을 발휘하죠. 그리고 숫자는 의사소통을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수용성을 높이는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숫자는 상대방에게 ‘생각의 고통’을 주지 않죠. 숫자로 얘기하면 다른 것을 따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숫자가 맞는지 틀리는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그래서 보고서 작성기법을 주제로 한 각종 책이나 강좌에서는 최대한 숫자화할 것을 제 1 규칙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처럼 숫자가 의사결정의 정확성과 간편성을 높인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숫자에 대한 맹신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첫째, 숫자는 지나치게 상황을 단순화합니다. 인력 채용에서 '우수인재 확보율'을 관리하는 회사가 늘고 있는데, 그 기준이 기껏해야 출신학교나 학점수준 등에 불과합니다. 명문대 출신을 몇 명 뽑았다는 그래프를 보고 인사담당자는 뿌듯해 하죠. 그러나 좋은 학교, 높은 학점이 직장 내에서의 우수한 성과를 보장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둘째, 숫자는 조작이 쉽습니다. 모 회사 공장은 납기단축을 목적으로 성과지표(KPI)로 ‘입고 후 출고시간’을 관리하더군요. 그 지표는 항상 목표를 초과달성하고 있었기에 별 문제가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납품은 여전히 늑장이었어요. 알고 보니, ‘입고 후 출고시간’을 임시창고에 완성품을 갖다놓는 시점까지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납기의 문제는 물류에 있었으나 공장 측은 문제를 숨겨보려 출고 시점을 조작했던 겁니다.
셋째, 숫자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가로 막습니다. 갓 생각해 낸 새로운 아이디어는 완벽한 논리를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그만큼 숫자로 덜 무장되어 있다는 뜻이죠. 그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데 인력과 비용이 얼마나 소요되는지, 아이디어의 결과로 나오는 산출물이 회사의 수익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 숫자로 정확히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숫자에 집착하는 이들로부터 무차별 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크겠죠. 상사가 ‘숫자 킬러’라면 부하직원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숫자의 기세에 눌려 세상에 나오지도 못합니다.
숫자는 강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취약하기도 합니다. 숫자를 잘 관리하라는 말은 ‘뭐든지 숫자로 측정하고 표현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정량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숫자로 잘 표현하고, 정성적 측면이 더 큰 의미가 있다면 숫자화시켜 의미를 상실케 하지 말고 그대로 수용하고 잘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중국 정나라 때 한 남자가 신발가게에 와서 자기 발 치수를 적은 종이쪽지를 집에 두고 온 사실을 알았다. 당황한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 쪽지를 가져왔지만, 신발가게는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친구가 물었다. “아니, 발이 있는데 종이쪽지가 왜 필요한가?” 그러자 남자가 당연 하다는 듯 대답했다. “발보다야 숫자가 더 정확하지!”
숫자 좋아하다가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오류에 빠진다는 걸 염두에 두기 바랍니다. 어릴 때 '어린왕자'를 읽고 '나는 숫자만 좋아하는 어른은 되지 않을거야.'라고 다짐했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