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소련은 왜 독일에게 처음부터 ‘깨진’ 것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리더십의 부재’였습니다.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최측근에게조차 나누려 하지 않았던 스탈린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자가 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자비하게 숙청하거나 투옥시켰습니다. 군대의 장성들과 고급장교들도 ‘대숙청’에 예외는 아니었죠. 주요 직위가 경험없는 장교들로 채워졌으니 초장에 ‘무참히 깨지는 건’ 당연했습니다.
소련군이 초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두 번째 이유는 바로 ‘혁신에 박차를 가했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것 같은데요, 소련군의 사례를 보면 혁신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 혁신을 추진하던 도중 한방에 ‘훅’ 갈 수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겨울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39년 11월 30일에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함으로써 벌어진 전쟁입니다. 겉으로는 소련의 승리로 끝났지만(1940년 3월 종전), 핀란드를 정복하겠다는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고 전쟁 내내 소련군은 핀란드군의 영리한 전략에 끌려다니며 고전했습니다.
약소국을 상대로 고된 싸움을 벌였던 까닭으로 지적된 것이 ‘군관구’라고 불리는 소련군의 독특한 조직 체계였습니다. 각 지역에 주둔하는 군대로 자체적으로 전략 수립, 전투 수행, 행정, 보급 등을 책임지는 형태가 군관구였는데, 봉건시대의 영주가 자체 군대를 이끌던 때의 습성이 군관구로 이어진 것이었죠.
다른 군관구는 뒷짐 지고 관망한 채 레닌그라드 방면 군관구만이 핀란드와 전쟁을 벌였으니, 군사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맥을 못 춘 거라고 판단한 소련은 봉건주의적 군 체계를 중앙집권적인 체계로 변화시키는 혁신을 감행했습니다. 1년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혁신의 속도는 매우 빨랐는데, 이는 스탈린 1인 독재체제가 가져다 준 장점이라면 장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점에 있었어요. 군관구가 폐지되고 겉으로는 중앙군 체계가 수립되었다 하더라도 그 속까지 빠르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기업의 규모가 크건 작건 인사제도의 방향성을 바꾸고 나면 안정화하는 데까지 적어도 3년이 걸릴 거라고 보는데, 소련군처럼 거대 조직(475만명)의 체계 혁신이 1년 안에 모두 완성될 수 있었을까요? 전략 수립, 보급, 행정 등을 새 체계에 맞추느라 모두가 우왕좌왕하며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말았죠. 군관구를 폐지하고 1년도 안 돼 독일이 쳐들어왔으니 소련 입장에서는 혁신이 되려 악재가 된 셈이었습니다.
‘가죽 혁(革)’자에 ‘새로울 신(新)’자를 쓰는 혁신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기존의 가죽을 모두 벗겨내고 새로운 가죽으로 몸을 싼다는 뜻입니다. 가죽을 바꾸는 과정에서 ‘알몸’이 노출되니 병원균과 천적이 공격이라도 하면? 혁신은 매우 위험한 모험입니다. 언제나 장미빛 미래만을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덧붙이는 글)
소련의 입장에서 다행인 것은 혁신의 효과가 소련군이 독일군을 스탈린그라드에서 몰아내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1943년에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1940년에 실시한 혁신이 3년 후인 1943년에 효과를 발휘한 걸 보면, 크고 작은 변화가 안착할 때까지 적어도 3년이 걸린다는 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일종의 경험법칙(rule of thumb)입니다. 이 법칙은 혁신 후에 바로 효과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같이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