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안다는 것'을 정의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본다면 '위대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여러 발견이 사실임을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그걸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양자역학의 태동에 기여한 위대한 과학자가 왜 그랬을까요?
두 번째 기준인 '정당화'는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말하려면 자신의 믿음에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수학적 증명이든, 과학적 실험이든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제시되어야만 우리는 그것을 지식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1 + 1 = 2임을 안다면, 그걸 믿어야 하고 그걸 증명해야 하는 의무감도 함께 부여됩니다.
옥스포드 소사전(Shorter Oxford Dictionary)에서 믿음을 뜻하는 ‘Belief’는 “제안, 진술, 사실을 ‘권위나 증거를 기반으로’ 진실로 인정하는 정신적 동의나 수용”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 정의에서 보듯이 믿음을 믿음답게 만드는 것은 믿음에 관한 증거입니다.
세 번째 기준인 '진리'는 결과론적인 기준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더라도 그 믿음이 앎이 되려면 진짜로 옳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또한 당연한 말이죠.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믿고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더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면 지식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많은 이들이 믿었고 충분히 정당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가 아니었던 사례를 무수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천동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는 보통 단지 그 새의 이름만 알 뿐인데도 모든 걸 안다고 자부하곤 합니다. 누군가 개똥지빠귀 이야기를 하면 “아, 나 그 새에 대해 알아”라고 참견하곤 합니다, 하지만 사물의 이름을 아는 것과 사물의 본질을 아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 새가 어떤 색의 깃털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소리로 우는지, 어떻게 새끼를 키우는지 등을 체험과 증명을 통해 아는 것이 더 중요하죠.
안다는 것은 적극적이고 동적인 과정입니다. 무언가를 굳게 믿고 그것이 진리하고 증명할 수 있어야 여러분은 그것을 비로소 '아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의 세 가지 기준을 들여다 보면서 '내가 아는 것'이 진짜로 지식인지 고찰해 보기 바랍니다. 그저 믿음으로 그치면 '나는 옳다'라고 우기는 이들이 꽤 많아서 하는 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