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제도를 없애세요.” 저는 CEO나 인사담당자들을 만날 때마다 이 말을 주저없이 던졌습니다. 직원을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평가를 해야 연봉을 결정할 수 있는데, 평가를 없애라니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었을까요? 상대는 늘 놀란 눈을 하며 저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평가를 없애라는 ‘공격적 제안’에 많은 이들이 반발했기에, 그리고 예상 질문들이 거의 비슷했기에 반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저는 평가를 없애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연구 논문으로 검증된 결과들을 제시하며 평가제도가 일으키는 다양하고 심각한 문제를 지적했죠. 심각한 표정으로 듣던 상대는 제 설명이 다 끝나면 십중팔구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평가를 없애면 그 대신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질문의 기저에는 ‘평가를 없애면 직원들이 일을 안 할 것이다.’라는 우려가 깔려 있었습니다.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무언가 강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으니까요. 대안을 달라는 뜻인데, 저는 짐짓 모른 척 하면서 이렇게 대꾸하곤 했습니다. “평가를 없애면 됐지, 또 뭘 하려고 하세요?”라고요. 그러면 상대는 아까보다 더 깊이 미간을 찡그렸습니다. 속으로 ‘이 사람이 장난하나?’ 싶었을 것입니다. 저는 잠깐 침묵을 유지하다가 상대에게 평가를 없앴을 때의 대안을 차근차근 제시했습니다. 물론 먼저 평가를 없앤 타사의 사례를 들어가면서 말이죠.
하지만 저는 자괴감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자세히 설명하고 타사 사례를 들어가며 이해를 시켜도 이미 화석처럼 박힌 제도를 없애려고 시도한 회사는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요. 평가의 대안을 제시해도 평가만큼의 강제성과 압박이 없다는 이유로 ‘까이기’ 일쑤였습니다.
상시 피드백을 통해 직원의 성과 창출 과정을 꾸준히 모니터링하고 지원해야 하는 것이 점수 매기듯이 1년에 한두 번 평가하는 제도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효과적이라는 저의 주장은 효율과 일괄 조치를 좋아하는 경영자들에게 잘 먹히지 않았습니다. 경영의 복잡성을 해제하고 ‘심플’한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담론에 다들 동의하면서도 정작 실행은 주저하고 ‘그래야 하는 이유’를 너무나 따져 묻는 경영자들이 꽤나 많다는 데 저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런데 요즘 업계를 돌아보니 많은 기업들이 복잡한 시스템의 무게에 짓눌려 있음을 깨닫고 경영의 기본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점차 주류가 되고 있는 듯 합니다. 제가 욕을 먹어가며 줄기차게 외친 ‘평가를 없애라’는 주장이 이제 인사관리의 메인 테마 중 하나가 됐다는 게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죠(물론 시대를 역행하는 기업도 몇몇 있지만). 늦은감이 있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흐름입니다. AI시대일수록 우리는 경영의 본질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근 1년간 연재한 '유정식의 경영일기' 시즌 1을 마무리하면서 저의 컨설팅 원칙 'Not Plus, But Minus'에 관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풀어봤습니다. 앞으로 제가 얼마나 오래 컨설팅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원칙은 컨설팅을 끝내는 날까지 유지하고픈 제 신념입니다. 2024년에도 여러분의 복잡한 경영 시스템을 조금이나마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하는 컨설턴트가 되고자 합니다.
즐거운 성탄절 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1년간 구독해 주셔서 감사 드리고,
2024년 1월 15일에 시즌 2로 인사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