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넘도록 경영 컨설턴트로 일해온 나는 코로나 19가 한창이던 때 출판사 대표라는 새로운 직함을 달았다. 그동안 저자나 역자의 입장에서 책을 쓰다가 출판 일을 하게 됐으니 경영학 용어로 말하자면(좀 거창하다 싶지만) 가치 사슬 상에서 '후방 통합'을 한 셈이었다. 사람들이 내게 왜 출판사를 만들었는지 물을 때면 팬데믹 탓에 컨설팅이나 강의 같은 대면 서비스의 길이 막혔으니 비대면으로 활동 가능한 출판을 해볼까 싶었다고 답하곤 한다. 조금은 충동적이었달까? '내 명의의 출판사를 만들어 내가 출간하고 싶은 책을 내 마음대로 내면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얄팍하고 장난스런 생각이 출판사 등록 신청서에 서명을 한 이유였다.
“책이나 쓰던 나부랭이가 장난삼아 출판사를 내다니 이 시장을 우습게 알아도 유분수지!”라고 출판업계 종사자분들이 화를 내실지 모른다. 양해를 구하는 마음에 말씀드리자면, 첫 책의 출간 작업을 시작하면서 시쳇말로 '현실 자각 타임(현타)'이 강하게 왔고 가벼웠던 장난기 역시 쑥 빠져 버렸다.
“출판이 로켓 사이언스도 아닌데, 별 거 있겠어?”라며 가볍게 접근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라고 못할 이유는 없어 보였으나 책을 쓸 때와 책을 만들 때 필요한 스킬은 확연히 달랐다. 책을 쓸 때는 해당 주제에 대한 전문성과 경험, 글쓰기 솜씨, 전체적인 구성 능력, 여기에 책이 잘팔릴 만한 요소를 첨가하는 센스만으로 충분하다.
반면에 책을 만들 때는 ‘생산 프로세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있게 운영해야 하고 유통과 마케팅, 영업까지 모두 수행해야 한다. 저자가 출판일에 뛰어드는 것은 R&D 직원이 공장에 가서 생산 공정을 돌리고, 모든 공정을 거쳐 나온 제품을 유통업체에 보내고, 소매점들과 판매 계약을 맺거나 영업하는 일을 총괄하는 것과 같다. 나는 생전 해보지 않았던 서점의 발주서 처리와 출고관리를 해야 했고, 온/오프라인 서점들과 공급률(납품 가격)을 놓고 협상을 벌여야 했다. 인쇄소를 컨택해 책의 ‘제작 사양’을 자세하게 전달해야 했고, 배본 유통사와 계약을 해서 책의 입출고 및 배송을 대행시켜야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나에게 요구한 역량 중 하나는 ‘꼼꼼함’이었다. 숫자를 잘못 입력하거나 필요한 서류 하나를 누락하기라도 하면 관련된 모든 이들을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에 매번 신경을 무지하게 써야 했다. 그렇게 조심을 했는데도 모 서점과 맺은 계약서에 그 중요하다는 공급률 숫자를 잘못 기입하는 바람에 식겁하고 말았다. 다행히 서점 측의 아량으로 계약서를 수정할 수 있었지만, 서점 측에 수정을 허할 때까지 하루 종일 다른 일을 못할 정도로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시행착오의 경험이 이것만은 아니었다.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출판계에도 고유의 용어들이 존재한다. 나는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들을 일 없는 출판 관련 용어들, 게다가 한자어와 일본어가 뒤섞인 용어들을 짧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배워야 했다. 예를 들어 ‘도비라’라는 일본말은 원래 ‘문짝’을 뜻하는데, 출판에서는 챕터를 구분하는 페이지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면지’란 말은 책 표지와 책 본문 사이에 들어가는 약간 빳빳한 종이를 일컫는 말이다. 나는 인쇄소 사람들이 ‘세나카’란 말을 하길래 처음에는 로마 시대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Seneca)를 말하는 줄 알았다. 알고보니 우습게도 ‘책등’을 일컫는 일본말이었다. 출판에 문외한인 내가 이런 전문용어가 뒤섞인 대화 속에 놓여져 있었으니 마치 외계 행성에 떨어진 기분이었다고 말하면 과언이려나?
회의나 전화 통화 내내 본인 할 말만 속사포처럼 쏟아내니 내가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설명해 가면서 조근조근 말씀해 주시지'하며 처음엔 좀 섭섭하기도 했지만, 용어 습득이라는 사전 준비 없이 무작정 뛰어든 내 잘못이 사실 컸다. 신고식 삼아 은어에 가까운 용어로 나를 골려 줄 의도였다면 그 역시 내가 감수해야 할 과정이었겠지 싶다.
10여년 전에 이 책을 번역해 놓고 정작 이런 좌충우돌을 경험했으니 면구스럽기 그지 없다. 만약 출판사를 내기 전에 이 책을 사업을 시작하려는 독자 입장에서 다시 읽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출판업계 사람들을 좀더 많이 만나서 어떻게 책이 만들어지는지, 그 세계의 언어는 무엇인지, 알아야 할 중요한 팁은 무엇인지 등을 물어봤을 것이다. 혹은 책 제작 현장을 따라다니며 배울 목적으로 아는 편집자에게 '저를 인턴으로 써 주십시오'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가 강조하듯이, 내가 출판사를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출판사를 '해야 하는가'란 질문을 놓고 좀더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첫 책을 냈고, 지금은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책을 동시에 준비하는 중에 이 책의 개정판 소식이 들려왔다. 오랜만에 읽어보니 저자가 10여년 전에 수많은 예비 사업가들에게 던졌던 충고는 여전히 예리하고 유효하다. "사업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애초에 사업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 사업을 시작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저자는 무언가로부터 탈출하려고,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실현하고 싶어서, 돈을 많이 벌려고, 멋진 사무실에서 사장 노릇을 하고 싶어서, 자유 시간을 즐기려고 사업 시작을 결심한 이들에게 현실을 직시하라 일갈한다.
저자의 충고가 매우 간명하고 직설적이라 사업할 의지를 꺾으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지 모르나, '할 수 있다'고 의지의 엔진에 불을 붙히는 자가 있다면 '해야 하는가'라고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사업가의 성공을 진정 바라는 저자의 의도를 새기는 사람만이 지금 구상하는 사업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예비 사업가 여러분의 냉철한 고민을 응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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