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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은 사업가입니까』를 2014년에 번역한 적이 있다. 창업을 미화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그 책은 냉정한 경고를 날렸다. "준비되지 않았다면 시작하지 마라." 창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를 점검하라고 요구하는, 일종의 빨간 신호등 같은 책이었다. 그때는 벤처기업이란 말 대신 스타트업이란 단어가 유행어가 되면서 준비 없이 뛰어드는 사람들이 꽤 많았기에 "잠깐, 정말 준비됐어?"란 브레이크가 유효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그 쉽지 않은 준비 테스트를 통과한 이들에게 체계적인 창업 가이드를 제공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허나 이 책의 초판인 『MIT 스타트업 바이블』의 초판이 바로 출간되면서 그 갈증은 말끔히 해소됐다.
보통 사업을 일종의 '예술(art)'라고 보는 시각이 많은데, 저자 빌 올렛은 하버드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MIT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마친 이력에 걸맞게 창업 과정을 '공학'으로 본다. 그는 복잡한 문제를 작은 단위로 분해하고, 변수를 통제하며, 실험으로 검증하는 공학적 사고를 창업에 그대로 적용했다. 그 결과가 바로 24단계의 창업 로드맵인데, 막연한 영감이나 신화적인 서사를 배제하고 체계적인 프로세스로 창업을 재정의했다는 점이 전 세계에 3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였다.
초판이 나온 지 10년이 흐른 지금,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놀랍도록 성장했다. 토스, 무신사, 두나무 등 유니콘 기업들이 늘었고, 센드버드, 베어로보틱스 등 글로벌 시장에 도전하는 스타트업도 등장했다. 실패를 딛고 재창업하는 연쇄 창업가들의 이야기도 낯설지 않을 만큼 투자 생태계 역시 한층 정교해졌기에 이제는 "섣불리 창업하지 마라"란 메시지보다 "창업하려면 제대로 하라"란 메시지가 예비 창업가들에게 절실한 시점이다.
그렇기에 이번 확장증보판은 더 반갑다. 기본 틀은 유지하되 지난 10년간 전 세계 수천 명의 창업가들이 이 방법론을 실전에 적용하며 쌓은 피드백이 반영됐고, 디지털 전환, 플랫폼 비즈니스, AI 혁명이라는 새로운 창업 환경에 맞춰 진화한 내용들이 추가됐다. 때로는 "굳이 이렇게 디테일한 것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지 모르지만, 창업의 24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갈 때 성공 확률이 크게 오른다는 점을 이 책에서 제시하는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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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제시하는 24단계는 모두 중요하지만, 감수자로서 나는 한국 창업가들이 특히 간과하거나 하는둥마는둥 넘어가는 단계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다음을 선택하겠다.
첫째, 3단계 '최종 사용자 프로파일'과 이와 연결되는 5단계 '거점시장의 페르소나' 정의다. 많은 창업가들이 "우리 고객은 2030 여성입니다" 정도로 끝낸다. 하지만 이 책은 실제로 존재하는 한 명의 인간을 구체적으로 설정하라고 요구한다. 3단계에서는 실제 사용자들의 공통 특성을 파악하고, 5단계에서는 그중 대표적인 한 명을 선정해 김민지(28세), 강남 IT기업 마케터, 연봉 4,500만원, 지하철로 출근하며 유튜브로 뉴스를 듣고, 점심시간에 들른 카페에서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며, 퇴근 후 고양이를 옆에 끼고 넷플릭스로 시리즈물을 몰아서 본다는 식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많은 사람"을 위한 제품은 결국 "아무도 쓰지 않는" 제품이 되기 쉽다. 이 두 단계를 제대로 거치면 제품 개발부터 마케팅까지 모든 의사결정이 명확해지고 간결해진다.
둘째, 8단계 '가치 제안 정량화'다. 한국 창업가들은 "우리 제품을 쓰면 업무 생산성이 높아집니다.", "삶의 질이 향상됩니다.", "인간관계가 넓어집니다."와 같이 모호한 약속만 한다. 하지만 고객은 정확한 숫자를 원한다. 이 책은 가치를 반드시 숫자로 환산하라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우리 솔루션을 쓰면 월 20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이는 시급 5만원 기준으로 직원 1인당 월 100만원의 가치입니다." 또는 "우리 서비스로 고객 이탈률을 15% 줄여 연간 3억원의 매출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처럼 구체적이어야 한다. 정량화하지 못하는 가치는 고객에게 가치가 전혀 아니다. 특히 B2B 시장에서는 이 정량화된 가치가 구매 의사결정의 트리거가 된다.
셋째, 19단계 '고객 획득 비용(CAC)' 계산이다. "일단 만들면 고객은 알아서 온다"는 환상을 가진 창업가가 여전히 많다. 한 명의 고객을 확보하는데 얼마가 드는지, 그 고객이 평생 가져다줄 가치(LTV)는 얼마인지 계산하지 않고 사업을 시작한다. 더 큰 문제는 눈에 보이는 마케팅 및 영업 비용만 계산하고, 숨어있는 비용을 놓친다는 점이다. 영업 직원의 인건비, 무료 체험 기간의 기회비용, 추천 리워드, 심지어 창업자가 직접 뛰어다니며 고객을 만나는 시간까지 모두 CAC에 포함해야 한다. 저자도 이 단계에서 "모든 숨은 비용을 찾아내라"고 특별히 강조한다. 이 책은 CAC < LTV라는 단순하지만 절대적인 공식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특히 한국처럼 네이버, 카카오 등 플랫폼 의존도가 높은 환경에서는 플랫폼 수수료와 광고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때문에 CAC 관리는 생존과 직결된다.
넷째, 22단계 '최소 사업 가능 제품(Minimum Viable Business Product)' 정의다. 많은 창업가들이 MVP를 '대충 만든 프로토타입' 정도로 오해한다. 하지만 빌 올렛이 강조하는 MVBP는 차원이 다르다. 이는 기능을 덜어낸 제품이 아니라, 고객이 기꺼이 돈을 지불할 최소한의 완성품이다. MVP로 "이런 제품 어때요?"라고 물었다면, MVBP로는 "이제 돈을 내고 사세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창업가들은 종종 화려한 기능을 추가하느라 정작 고객의 지갑을 열 만한 핵심 가치를 놓친다. 10개 기능 중 9개를 제외해도 남은 1개가 고객의 절실한 문제를 해결한다면 그것이 진짜 MVBP다. 반대로 100개 기능이 있어도 고객이 "좋긴 한데 굳이..."라고 반응한다면 여전히 실험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MVBP를 제대로 정의하고 검증하는 것이 '취미'와 '진짜 비즈니스'를 칼같이 가른다.